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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Ⅰ. 성장과 사제 서품

베르뇌 시메온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입니다. 주교님은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교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의 신앙심은 그리 깊지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어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총명하고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하도 기특하여 본당 신부는 1824년 10세에 학교에 보냈으나 신학 공부를 시작한 것은 17세인 1831년이었습니다. 망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즐겁고 행복한 일 년이 흘렀으나 허약한 체질과 엄격한 규율로 인하여 건강을 잃어 2년간 휴학을 한 뒤 다시 공부하여 1837년 5월 30일 23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Ⅱ. 외국 선교사의 길

신부가 된 후 신학교에서 교수 신부로 지내던 중 사도 성소에 강하게 이끌려 1839년 7월 15일, 파리 외방 선교회에 입회하였습니다. 1840년 6월 26일, 정든 고국을 떠나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마닐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마카오를 거쳐 1841년 안남(베트남)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넉 달 만에 박해로 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프랑스 사령관의 도움으로 석방되고 마카오로 되돌아와 있던 중 만주 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10여 년간 만주 교구를 이끌었습니다. 1854년 8월 5일, 40세 나이에 교황 비오 9세는 베르뇌 주교를 조선 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하고 조선 입국을 명하였습니다.


Ⅲ. 조선에서 선교 활동

장 베르뇌 주교는 수많은 곤경이 가로 놓여 있음을 알면서도 소임에 만족하면서 "조선은 훌륭한 순교자들의 나라이다. 조선은 그 이름만 들어도 우리 선교사들 마음속에 의열이 넘쳐 뛰는 곳인데, 어찌 입국을 마다하리오" 하며 푸르티에 신부(Jean Antoine Pourthie,신요안(申妖案))와 숨어 살면서 입국을 시도하던 끝에 1856년에 조그만 배 한 척을 만나 4일 만에 기어이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조선어 공부와 경기도 지방의 60여개 공소를 돌보았습니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 신부(Daveluy,안돈이(安敦伊))의 부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성직자 회의의 결과로 그는 1857년 8월에 교인들의 행동지침·도리·칠성사·성영회규식 등으로 구성된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였고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에 주교로서의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성요셉 신학당에서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해 1856년부터 푸르티에 신부(1856-1866)를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1862-1866)를 교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신학생들을 교육시키면서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어 러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Ⅳ. 순교

그러나 러시아 상선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이 사건이 해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쇄국정책을 강행하면서 1866년 초에 병인대박해를 일으켜 그동안 사목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하였습니다. 천주교 박해가 다시 일어남에 따라 1866년 2월 23일, 포졸들이 장 주교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장 주교를 끌어내어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 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놓는 등 갖은 심문을 다하였습니다. 1866년 3월 6일, 52세 나이에 장 베르뇌 주교는 참수 사형선고를 받고 다른 신부와 함께 서로 머리를 맞대어 묶인 채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였습니다. 장 주교는 "우리가 조선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사형장은 한강의 넓은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 명의 군졸들은 천막을 쳐 놓고 순교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귀에 화살촉이 꽂혀지고 얼굴에 물을 뿌린 다음 회를 뿌리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어 치켜들고 사형장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너희 모두 듣거라. 너희가 전파하는 종교는 조선에서 엄금하는 바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너희 사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국왕께서는 너희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너희는 이를 알아라. 너희는 곧 죽을 것이다.> 사형집행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베르뇌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습니다. 베르뇌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습니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새남터 부근인 왜고개에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모셨습니다.


Ⅴ. 시복 시성

그 뒤 순교 후 102년 만에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성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되어 있으며 수지 본당에는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습니다.성인의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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