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목구 설정 190주년 특집]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삶과 순교
2021년 조선 대목구 설정 190주년을 기념하면서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생애를 정리합니다. 베르뇌 주교는 1856년 조선에 입국해 1866년까지 조선 천주교회의 기틀을 다진 병인박해 순교 성인입니다. 본 연구소는 베르뇌 주교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으며, 2018년 『베르뇌 주교 서한집(Lettres de Mgr. Berneux)』을 간행한 바 있습니다. 또 올해 10월 1일에는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조선 천주교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 선교 활동, 조선 인식 등에 관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하였습니다. 이에 본지는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로 다루어진 베르뇌 주교의 약전을 정리하여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이방인 선교를 열망한 베르뇌 신부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uex, 張敬一, 시메온, 1814~1866) 주교는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뒤루아(Château du Loir)라는 마을에서 1814년 5월 14일에 태어났다. 르망 중학교와 프레시네(Précigné) 소신학교를 거쳐 르망 대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수학하는 동안 건강 악화로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앙리 드 라 부이으리(Henri de la Bouillerie) 가족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휴양하였다.
1834년 10월 대신학교로 다시 돌아온 그는 1837년 5월 20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대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철학을 가르쳤다. 그 후 이방인 선교에 헌신하려는 일념에서 1839년 7월 파리 외방전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1840년 1월 15일 통킹(Tonkin, 베트남 북부) 선교사로 임명된 베르뇌 신부는 그해 2월 마카오를 향해 출발하여, 9월 21일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통킹으로 갈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조선에서 유학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학생에게 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841년 1월 마침내 마카오를 떠나 목적지인 푹낙(Phuc-nhac)에 정착할 수 있었지만, 곧 체포되어 감옥에서 여러 번 문초를 받고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사형 집행이 지연되는 동안 프랑스 군함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1843년 3월 12일 선교사 5명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 베르뇌 신부의 근 2년 동안의 긴 감옥살이는 이렇게 끝이 났다. 다른 선교사들은 프랑스로 돌아갔고, 베르뇌 신부는 마카오로 되돌아와 만주 대목구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44년 3월 15일 만주 요동(遼東)에 도착한 베르뇌 신부는 대목구장 베롤(J. Verrolles, 方若望, 요한) 주교의 신임을 얻으면서 1849년에 대목구장 직무 대행(provicarius)이 되었고, 1854년 3월 11일에는 계승권을 가진 부주교(coadjutor)가 되었다.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J. Ferreol, 高, 요한) 주교는 일찍이(1845년 7월 15일) 베르뇌 신부를 그의 부주교로 지명했으나 베르뇌 신부는 그것을 거절했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미 그를 베롤 주교의 부주교로 발령하였고,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갑사 명의 주교이자 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를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한 1854년 8월 5일 자 교황 소칙서가 12월 24일에 도착하자 베롤 주교는 12월 27일 그의 주교 서품식을 거행하였다.
주교 서품 직후 베르뇌 주교는 건강상의 이유와 고령을 이유로 포교성성(한 인류복음화성) 장관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건강이 거의 회복되자 그는 포교성성의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고자 1855년 9월 상해로 갔다. 그곳에서 새로 조선에 부임하는 프티니콜라(M.A. Petitnicolas, 朴德老, 알렉산데르) 신부와 푸르티에(J. Pourthie, 申妖案, 요한) 신부와 합류한 뒤, 그들과 함께 주교 일행을 영입하기 위해 조선에서 건너온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의 안내를 받아 이듬해 1월 17일 상해를 떠났다. 그들은 2개월간의 길고도 어려운 항해 끝에 3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심화시킨 베르뇌 주교
어느 정도 조선말을 익히게 되자 베르뇌 주교는 우선 교우들을 찾아 나섰다. 이렇게 사목 방문으로 첫해를 보낸 그는 11년간의 활동으로 조선과 사목에 관해 누구보다도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신부를 1857년 3월 25일 조선 대목구 부주교로 서품하고, 이튿날부터 3일 동안 조선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사천 시노드 문헌’을 기초로 조선 교회 실정에 맞게 변형한 이 회의에서는 조선 천주교회 지도서의 기초를 마련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교회의 모든 문제를 폭넓게 심의하였다. 이 회의 결과를 베르뇌 주교는 8월 2일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공식 사목 지침서로 반포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선교 활동을 확대할 수 있도록 파리 본부에 선교사의 증원을 수시로 요청하였다. 그 결과 1865년까지 9년 동안에 무려 10명의 선교사가 조선에 새로 파견될 수 있었다. 그동안 1860년의 경신박해(庚申迫害)와 북경의 함락으로 인한 조선의 혼란, 유일한 현지인 성직자 최양업 신부와 젊은 두 선교사의 병사 등으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2명의 주교와 10명의 선교사가 벌인 끈질긴 활동은 1857년 15,000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를 1865년에는 23,000명으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르뇌 주교 자신도 1863년 말부터 직접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선교하여 많은 성과를 올림으로써 교세는 지역적으로도 확대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직접 선교뿐만 아니라 간접 선교와 특수 사목 분야에도 남달리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우선 그는 교우들이 교리에 무지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 서적으로 그들을 교육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것은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이었기 때문에 성직자의 절대적 부족에도 신부 1~2명이 교회 서적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전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일은 주로 다블뤼 주교에게 위임되었지만, 공과(功課)나 문답(問答) 같은 기도서나 교리서는 자신이 직접 감수하였다. 한편 베르뇌 주교는 서적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목판 인쇄소의 설립을 서둘렀다. 그 결과 1861년부터 2곳의 교회 목판 인쇄소에서 10여 종의 교회 서적이 다량으로 인쇄되어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1857년 9월 24일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82위가 가경자로 선포된 것을 계기로, 그분들을 현양하고 시복을 촉진하기 위해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 수집 및 편찬 작업을 다블뤼 주교에게 위임하였다. 이와 같은 베르뇌 주교의 선견지명으로 미구에 유명한 조선 순교사(달레[Ch. Dallet]의 『한국 천주교회사』의 근간이 됨)가 빛을 보게 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또한 성영회(聖嬰會) 사업과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조직적으로 추진하였다. 그중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는 어려운 외적 환경과 뜻밖의 박해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나, 성영회 사업만은 그 지원금으로 이미 1859년에 43명의 기아(棄兒)를 거두어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을 위한 시약소를 설치하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이루어내지는 못하였다. 성영회 사업의 발전을 위해 베르뇌 주교는 이미 1857년에 「성영회 규식」을 만들어 이 거룩한 사업에 교우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조하도록 그 기반을 마련해 놓았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베르뇌 주교
그 후 러시아인이 국경지대에 자주 나타나자 홍봉주, 남종삼(南鍾三, 요한) 등 교회 지도급 인사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1866년 초 대원군에게 방아책(防俄策)의 일환으로 교회와의 협조를 건의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만족해하며 주교들과의 면담을 약속하였다. 이에 북방에서 선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는 사목 방문을 중단하고 1월 29일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간 박해자로 돌변한 대원군은 면담 약속을 기다리고 있던 베르뇌 주교는 1866년 2월 23일(음 1월 9일)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거처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서울과 인근에 있던 3명의 신부(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신부)도 잡아들였다. 조선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피해가 막심했던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베르뇌 주교는 우포도청에서 문초를 받았다. “불법으로 입국, 사교(邪敎)의 두목이 되어 그 교를 가르쳤다.”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 3월 2일 의금부로 이송되어 세 차례의 추국을 받았다. 그는 신자들의 이름, 서양인 신부의 숫자와 거처를 대라는 협박에, 천주교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므로 바로 고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재판관의 귀국 권고에 대해서는 “이미 이 나라에서 10여 년을 지냈고 이 나라의 언어와 풍속에 익숙하여 즐겁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죽이지 아니하면 크게 다행으로 생각하겠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한이 있어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일축하였다. 마침내 군문효수의 극형이 선고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위의 신부 3명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에 박순지(朴順之, 요한)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안장되었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로 옮겨졌다. 1899년에는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의 공식 확인을 거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으며, 1900년 9월 5일에는 종현(鐘峴, 현 명동) 성당 지하실로 다시 옮겨졌다가 시복을 앞둔 1967년에는 절두산 성당 지하 성해 안치소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의 순교자 기념관에는 베르뇌 주교의 목자 지팡이[牧杖]와 한국어 서한 등이, 절두산 천주교 순교자 박물관에는 성합(聖盒), 오륜대 한국 순교자 박물관에는 1864년의 교서(敎書), 유해 현시대, 십자가 등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병인박해의 동료 순교자 23명과 함께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된 베르뇌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복자와 함께 ‘103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통킹에서 시작한 신앙의 증거를 만주와 조선에서의 활동으로 계속하였고, 마침내는 그것을 순교로 완성한 거룩한 순교 성인이다.
[교회와 역사, 2021년 10월호(vol. 557), 정리 한국교회사연구소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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